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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작가

제6회 양평을 빛낸 원로작가전[배동환.홍용선]
프로그램명 양평을 빛낸 원로작가전
기간 2017.12.15.-2018.2.18.
장소 제3전시실

제6회 양평을 빛낸 원로작가전

배동환(서양화가), 홍용선(한국화가)

2017.12.15.-2018.2.18.




배 동 환

Bai, Dong-Hwan

 


 

서양화가 배동환 선생의 작품세계
생성과 소멸, 해체적 선묘의 유희



배동환 선생은 녹차의 고장인 보성군 벌교에서 태어났다. 경전선(1922년)이 동부지방을 관통하는 벌교는 일제강점기 때 농수산물을 수탈해가는 창구가 되었던 지역이었으며,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 문학관이 자리한 문화도시이자 동서로 관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선생은 역사에 역무원으로 근무하던 아버지 배영근과 어머니 송몽순 여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중학교시절은 줄곧 벌교에서 성장기를 보냈으며 고등학교는 광주에 있는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 진학반에 들어가 3년 동안 장학금을 받으면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에 있는 서라벌대학에 들어가 고명한 스승들의 지도 속에 (당시 지도교수로는 서양화 방영선, 장리석, 박창돈, 황유엽, 정영렬 교수가 있었고 한국화 지도교수는 청강 김영기, 소정 변관식, 권영우 교수가 재직하였다.) 학창시절 회화기법과 예술가로서의 정신적 중심을 이루는 철학적 사고를 깨닫게 되었다.


배동환 선생의 학창시절인 1960,70년대는 서구 미술사조의 인상주의적 방법론이나 추상, 표현주의적 기법이 국내 화단에 등장한 시기였다. 그 후 수년 동안에 수많은 격동기를 거치면서 한국현대미술의 변모는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되었으며 70년대 초 단색회화운동(Monochrome  Art)가 미술계에 주류를 이루는 시기였다.


이 시기의 한국에서 작가로서의 위상은 국전(國展)을 거쳐야 작가로 인정받은 시기였으며, 작가면 누구나 주·야로 창작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다. 중단 없는 작품연구로 72, 75년도에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하게 되었고, 74년도에는 국전에서 자연을 재현하는 극사실(Hyper realism, 極寫實主義)작품 ‘성지(聖地)’가 문공부장관상수상과 한국미술협회전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고, 78년도에는 최초의 민전인 한국일보가 공모한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수상 기념으로 간 프랑스 파리에서의 세계미술 레지던시 활동은 작가로서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생은 작가로서 첫 개인전을 1976년 광주 YMCA 전시관에서 개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듬해인 77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서울 현대미술초대전과 역대 국전 수상작가전에 초대되면서 한국미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작가로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이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80년대 전국 일원의 민주화운동과 민중미술운동이 한창인 시기에는 선생이 지역 민중미술작가로 불릴 만큼 민주화와 민중미술이 그의 삶을 관통했고 작가로서 화업은 시간이 갈수록 존재하는 자(者)로 고통(苦痛)과 상흔(傷痕)을 화폭에 담아내기에 중요했다. 그것은 기존의 심미주의적 형식주의가 주를 이루는 작품경향을 사회에 대한 발언으로 말미암아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해야 한다는 미술인들의 자각이 일어나 한국미술의 새 흐름을 형성하는데 한복판에 서기도 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나타나는 작품의 성지(聖地)시리즈 즉, 대상으로서 구덩이(Pits, Hole)형상으로 펼쳐지는 작품들이 주를 이루는데, 이 구덩이 작품들은 생(生)의 윤회(輪回) 즉, 생성(生成)과 소멸(燒滅)의 상징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이 작품은 2가지로 요약되어 나타나는데 하나는 순수미학(純粹美學)의 심미안을 보여주는 것과 또 하나는 가치미학(價値美學)으로 표현되는 정신성 회화에 있다. 여기에는 태초의 자연, 세월의 풍파에서도 변함없이 존재하는 원초적 자연, 순리적인 자연, 그 자연 속에서 나 그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삶을 지향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의 여정을 담고자했다. 작품에 그려진 자갈은 자연의 순리에 따라 강, 바다의 바닥에서 오랫동안 깎여서 반들반들해진 잔돌들로, 선생은 자갈밭을 직접 걸으면서 느꼈던 점들을 작품으로 옮겼다. 이러한 순수 그대로의 자연에서 살아가는 생물의 존엄과 가치가 순환의 고리에서 윤회(輪回)하는 생의 존엄을 담아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작품에서는 본래의 자연이 갖는 자연 그대로의 자갈이 어떤 행위로 인하여 본래의 자아를 되찾고자 발돋움, 아우성, 저항, 쟁취하여 생존하고자 하는 본성 즉, 자연의 순리를 되찾고자 절규하는 모습과 한편으로는 생명력이 한계적 에너지로 타버리고, 잿더미가 되어버린 채 소실되어 무기력한 텅 빈 껍데기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으로 비춰진 대상들이다. 이 자연처럼, 순수한 우리는 권력 또는 어떤 집단으로 인하여 재편되어 본래의 자아를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상처투성인 현대인들의 인권, 정신을 구덩이의 자갈로 은유하여 치유하고자 했다. 여기에는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의 절대적 관념론 즉, 정·반·합으로 통합되는 것처럼 작가의 성지(聖地)시리즈는 대상으로써 생성이 공간을 지배하고 그 공간 속으로 소멸을 반복하며 허허로운 여백으로 하나 됨을 제시, 윤회설(輪回說) 그것을 표현한 시각예술이다.


이들 작품들은 대상으로서 존재적 가치가 화면분할과 조형성에 의미를 두고 있는데 구덩이의 시점이 상하좌우 또는 다양한 소실점을 갖게 하여 화면 안에서 대상의 경영위치(經營位置)가 어디에 놓이는 가에 따라 화면의 주목성이 다르게 지배하고 그 공간 속으로 관조자(觀照者)들을 스며들게 하는 것이 특징으로 나타난다.


 

 

[2017,우리들의성지291x218.2cm캔버스위에오일]

 

[1986역사의시간.130x130cm캔버스위에오일]

 

[2017,성지-C.259x194cm.캔버스위에오일]

 

 

[2017,발굴-A,180x200cm,캔버스위에아크릴]

 

 

[2017,무제-A.180x200,캔버스위에오일]

 

 

[2014,달빛정원-13,97.5x57cm,닥지위에아크릴]

 

[2014,달빛정원-14,97.5x57cm,닥지위에아크릴]

 

[2016,달빛정원-1,97.5x57cm,닥지위에아크릴]

 



홍 용 선
Hong, Yong-Sun




한국화가 홍용선 선생의 작품세계
삶의 여정에 존재하는 감정을 독자적 화법세계에 접목



홍용선 선생은 인천시 금곡동에서 영화잡화상점을 운영하신 아버지 홍사용과 어머니 이귀동여사의 3남 5녀 중 셋째이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초등학교 입학 후 곧, 한국전쟁인 6,25가 발발하여 강화도 외할아버지 댁으로 피난하기도 하였고 초등학교시절 각종 사생대회에서 상을 받았으며 초등학교를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선생이 화가의 길로 가게 된 것은 어린 시절 사범학교 교생선생님에게 들었던 ‘너는 그림을 잘 그리니 화가가 될 거야’, 화가가 무엇이 좋은지 물으니 ’‘화가는 남들보다 아름다운 것을 더 많이 보고 평생을 아름다움 속에서 살며 남이 모르는 아름다움을 창조하고 사니 얼마나 행복 하겠니’ 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이다.중?고등학교 때 방과 후나 방학 때면 의례히 화판을 메고 인천 청관거리를 누비며 그림 그리기에 빠져들었고 부친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작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1962년 3월 홍익대학교 미술대에 입학하였다.


자신이 사흘간의 단식투쟁에도 부친께서는 끄떡하지 않으셨으나 후에 선생은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재학 중에 미술평론 현상공모에 당선되기도 하였다. 선생이 대학교수가 되기 전에는 1972년에 모교 회화과에서 조교로 근무하였고, 1974년 모교 회화과에서 실기담당 강사로 출강하기도 하였다. 1975-80년 부산여자대학에서 첫 대학교수직에 근무하다 1981-1988년 부산대학교 사범대 예술대학으로 이직하였으며, 1989-1997년에는 서울의 세종대학교 예술대학에서 교수직에 근무하였다. 그리고 1998-2008년까지 홍익대학교 미술원 교수로 정년퇴임은 그간의 교수직을 내려놓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와 더불어 1989,96,97,2017년에는 대한민국미술대전의 심사위원과 운영위원을 역임하였고 1990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 젊은 모색전 한국청년작가 선정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동안 선생은 20회의 개인작품전을 가졌으며 특히 부친께서는 선생이 개인전 12번 째 쯤에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전시장에 오셔서 ‘수고 많이 했구나’, 라는 짧은 한마디로 선생을 위로하고, 마침내 부친에게 인정받은 선생은 더 많은 창작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후, 탈 서울을 감행하여 경기도 양평(1998년)으로 내려와 개군면 앙덕리 강변 가까이에 동생의 건축설계로 집을 짓고 정원에 나무와 꽃을 심어 가꾸며 살다보니 마음이 한결 다감해져서 그림과 함께 시를 쓰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꿈 많았던 어린 시절, 화가뿐 아니라 시인 그리고 가수와 연극배우도 되고 싶은데, 8남매의 장남이었기에 부친의 반대로 그나마 미대만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술적 에너지가 넘친 선생은 대학에 전임강사로 부임한 다음 해인 1976년에 부산의 모 나이트클럽에서 게스트 싱어를 하며 밤무대에 섰는데, 그것으로 잠시나마 가수로의 꿈을 이루기도 했다. 그리고 전국대학연극제(1979)에서 연출로, 경기도 소인극 경연대회(1998)에서 연기로 대상을 타기도 하였다.그래서 선생은 어릴 적 가슴속에 품은 꿈이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었던 것이다.

?
홍용선 선생의 첫 개인전(1976년)은 부산여자대학교에 재직하면서 개최하였는데 수묵산수화와 문인화 등 35점을 선보였다. 이때의 작품들은 밝음과 어둠의 대립구조 즉, 여명과 미명의 시각에서 찾아볼 수 있는 빛의 철학을 통해 수묵회화의 정신성을 재해석하여 보여주고자 했다. 특히 작품들은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듯 한 추상양식을 주도했던 70~80년대를 빼고 나면 관념산수와 실경산수를 오가는 한편, 용필(用筆)과 용묵(用墨)의 능숙한 솜씨로 전통을 살리면서 산수화의 리얼리티를 모색하려는 일념을 보여 왔다. 이러한 작품세계는 대체로 80년대를 전후하여 해외문화현장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감회를 다루고자 인물을 등장시켰으며 지구촌 다양한 문화유적들과 만나면서 작가의 감정을 결합하려는 의도가 돋보이는 시기였다.


특히 90년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중국기행에서 터득한 산수와 인물, 그리고 정서를 통합하기 위한 다각적인 실험들은 명실상부한 수묵회화의 서정성을 나타내기 위해 새로운 소재, 즉, 해질녘, 밤풍경 등을 수묵기법과 구성의 다양성이 생활정서화로서의 종합적 표현을 심화하는데 주력했음을 말해주는데 여기서도 역시 음양효과는 한층 더 인간 삶의 존재와 감정을 수묵세계에 융합하고자 하였다.


 


[백화제방(百花齊放)_스티로폼(수묵,채색)_270X180cm_2015]

 


[만화방창(万化放暢)_스티로폼(수묵,채색)_360X180cm_2015]

 


[월중매(月中梅)_스티로폼(수묵,채색)_180X90cm_2016]


 

[새봄_스티로폼(수묵,채색)_120X90cm_2015]



[꽃과 여인_스티로폼(수묵,채색)_180X90cm_2017]


 

[꽃을 든 소녀_스티로폼(수묵,채색)_90X120cm_2017]


 

[양평4계(四季)_남한강의 겨울_스티로폼(수묵,채색)_72X60cm_2017]


  


[지하철 스케치]









양평군립미술관 학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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